‘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결혼 30년 차 신혼부부

정기언(수원여대 총장), 서희순 부부

30년 만에 부부간의 대화 시작한 정기언 씨

결혼한 지 30여 년, 하지만 이들 부부는 아직 신혼이라 말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하며 집안일, 자녀 얘기, 하루 일상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부부. 아내는 “30년 넘게 결혼생활을 하면서 이런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교육행정가로서, 대통령 교육비서관과 교육부 차관보를 지낸 남편은 공무원들 사이에 ‘온화한 카리스마’로 잘 알려져 있다. 업무에서는 늘 대화와 설득으로 합리적인 조정을 해온 것, 하지만 가정에서는 ‘카리스마’에 더 비중이 실렸던가, 금슬 좋은 이 부부에게도 마음의 간격은 있었다고 한다. 그런 어느 날 정총장이 마음수련을 하면서 그 간격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평생 처음으로 “미안하다, 고맙다” 말한 남편

“조선시대 갓 쓰고 팔자걸음 하던 양반이 21세기에 갑자기 튀어나온 것 같은 사람이었어요. 아주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이었죠. 농담이나 실없는 소리를 해 본 적이 없어요. 빈틈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죠.”
부부간의 대화 시작하는 모습(핸드폰)    아내 서씨는 그런 남편이 참 어려웠다. 술을 먹고 늦게 들어오거나 주사를 부리는 일도 없고, 실수하는 일도 없었다. 한 치 흐트러짐 없는 남편의 모습에, 도리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믿음은 있었지만 남편으로서는 서운한 점이 많았다. 결혼한 이후 줄곧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직장생활 하랴, 살림하랴, 집안일이며, 아이들 문제며, 남편과 의논하고 싶고, 때로는 하소연하고 싶을 때가 많았지만 그때마다 남편은 말을 끊어버렸다.

“뭐 어떻게 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얘기 좀 들어달라고 한 건데, 결론도 없는 말을 해서 뭐 하냐, 시어머니한테 불만이 있으면 직접 얘기해라, 이런 식이었어요.”
그렇게 번번이 면박을 당한 후로 아내는 아예 입을 닫아버렸다고 한다. 점점 대화가 단절되어갔다. 함께 직장생활을 하니 서로 얼굴 마주보며 대화를 나눌 시간도 거의 없었지만 시간보다는 할말이 없었다는 것이 맞는 말이었다. 그랬던 부부가 요즘은 시시콜콜 할 이야기가 너무 많다. 이렇게 변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 정기언씨가 마음수련을 한 것이 계기가 됐다.

“2002년인가, 여름휴가 때 남편이 일주일간 수련을 하고 와서는 그동안 정말 미안했다고, 고맙다고 말하는 거예요. 평생 처음 그런 말을 들었죠. 감동스러웠어요.”
옆에서 미소 지으며 듣고 있던 정기언씨가 장난스럽게 말한다. “그 말만 했나, 사랑한다고도 했지.”

아내는 “신혼 때도 들어보지 못한 말을 다 늙어서 넘치도록 듣는다”며 웃는다. 정기언씨는 “자라오면서 보고 듣고 경험한 모든 것들이 잠재의식 속에 단단한 고정관념이 되어 자신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마음수련을 하면서 알게 됐다”고 한다.

“가부장적 위계질서가 엄격한 집안이었어요. 어려서부터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교육을 받으며 자랐죠. 어머니는 항상 아버지 우선이었고, 아들이 우선이었어요. 제가 자라서는 아들도 어려워하실 정도였어요. 여자라면 남자가 하는 일에 순종해야 되고, 시부모 모시고 살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집안일은 전부 아내의 몫이라는 사실에 대해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도, 잘못됐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죠.”

고정관념과 생각 버리니 상대 입장 보여

그 모든 고정관념과 생각들을 다 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아내 입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만 옳은 줄 알고 자신의 생각과 입장만 강요하면서 아내를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절절히 깨달아지면서 진심으로 참회가 됐다.
“똑같이 직장생활 하면서, 나는 집에 오면 꼼짝도 안 하는데 아내 혼자 온갖 집안일을 다 해온 거죠. 남편이라는 사람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힘들다 말하면 면박만 주고, 가장 가깝다는 배우자에게도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하게 했으니, 몸도 약한 사람이 의지할 데도 없이 그 오랜 세월 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 생각이 드니까 너무 잘못했고 미안해서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집에서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이거 달라, 저거 달라 시키기만 하던 그가 요즘은 설거지, 청소는 기본이다. 항상 근엄하게 굳어 있던 얼굴도 ‘못난이 인형’처럼 웃는 얼굴로 변했다. 그가 이렇게 변한 것을 누구보다 좋아한 건 아이들이었다. 엄하고 무섭기만 하던 아빠가 농담하고 장난치는 모습에 아이들이 너무 신기해하고 좋아했다.
“사실 아내나 아이들이 원한 건 이야기 들어주는 거, 따뜻한 말 한마디, 손 한번 잡아주는, 아주 사소한 것들인데 전에는 그걸 몰랐어요. 그저 내가 바르게 성실하게 살고 열심히 일해서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지위가 올라가면 가족들에게 다한 거 아니냐 그런 생각으로 살아왔던 거죠.”

마음수련으로 잃었던 가족을 되찾았다는 정기언씨. 집안의 가장으로 항상 군림하려 했고, 자기 입장에서 자신이 필요한 것만 가족들에게 요구했던 그였지만 요즘은 저절로 아내나 아이들이 뭐가 필요할까, 도와줄 게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단다. 고정관념이나 의무감, 체면, 격식 따위를 다 버리고 나니 가족관계뿐만 아니라 직장생활도 편해지고 몸이 날듯이 가벼워졌다는 정기언씨는 아내에게도 마음수련을 권했다.

“사실은 남편에 대한 거부감 같은 게 옛날부터 있었거든요. 그래서 남편이 권하는 건 하기 싫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런데 남편이 마음수련하고 완전히 변했잖아요. 저 사람이 이 정도로 변했다면 마음수련에 뭔가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들었죠.”
서희순씨는 시간을 쪼개어 마음수련 교원 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수련을 하고 보니까 항상 남편에게만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입장만 고수한다고 했는데, 나도 마찬가지였더라구요. 나도 내 입장에서만 판단하고 분별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죠. 그런 나를 버리니 남편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됐고 누구든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마음이 더 커진 것 같습니다.”

30년 만에 부부간의 대화 하는 부부

마음수련 안 했으면 ‘황혼 이혼’ 당했을 것

“전에는 피곤한 몸으로 퇴근하면 집안 분위기가 냉랭했어요. 아이들은 거실에 있다가도 내가 오면 인사만 하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려요. 옆에 있는 아내도 의무감으로 마지못해 있는 것 같고…. 막연히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뭐가 잘못됐는지 몰랐었죠. 내 잘못인 줄도 모르고 가족들한테 화를 내곤 했어요. 나중에 아내가 하는 말이 나에 대해서는 완전히 포기하고 애들만 보고 살기로 마음먹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대로 갔으면 아마 황혼 이혼 당했을지도 모릅니다.”(웃음)
그런 남편을 보며 서희순씨는 웃으며 말한다.

“이혼까지는 아니더라도 굉장히 삭막한 생활을 이어갔겠죠. 지금도 바쁜 것도 그대로 바쁘고 서로 시간이 없기는 마찬가지죠. 그렇지만 마음이 달라지니까, 저 사람이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나를 정말 생각해주는구나 그런 믿음이 생기니까 삶 자체가 완전히 바뀐 거예요. 저희 부부에게는 마음수련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된 셈입니다.”
마음수련 후 비로소 부부 사이에 삶의 동반자, 평생 반려자로서 진정한 신뢰를 갖게 됐다는 정기언씨는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젊은 부부에게 ‘언더스탠딩(understanding)’이라는 말의 의미를 짚어주고 싶다고 한다.

“이해한다는 단어를 보면 아래에[under] 선다[standing]는 뜻이잖아요. 상대보다 아래에 서는 낮은 마음이 되어야 진심으로 상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 또한 가부장적인 위계의식을 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아내를 이해할 수 있었죠. 낮은 마음이 되기 위해서는 ‘나’라는 존재를 다 버려야만 합니다.”
나를 버리고 낮은 마음이 되어야 감사와 행복의 참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하는 두 사람. 곁에 있어줘서 너무 감사하다며 손을 맞잡고 웃는 중년의 부부, 신혼처럼 달달하다.

이제야 서로 이해하는 중년의 부부

정 기 언 님은 1954년 전남 진도 출생으로 서울중앙고와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했다.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 미국 아이오와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교육행정 전공)를 받았다. 제19회 행정고시로 공직에 입문한 뒤 교육부 국제교육협력관과 서울대 사무국장을 지냈다. 대통령 교육비서관에 이어 교육인적자원부 차관보, 서울특별시 부교육감을 역임했으며 2006년 7월부터 동신대 총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수원여대 총장으로 재직 중이다. EBS교육방송 이사와 전인교육학회 부회장 등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서 희 순 님은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대전여고와 성균관대를 졸업, 서울시립대 대학원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교사, 교감직을 역임하며 교직원으로서 재직 중이다. 1983년 정기언씨와 결혼해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으며, 교원 연수 프로그램으로 마음수련을 경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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