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위기, 내 삶 돌아보자 답이 보였다

임종완 / 자영업

처음 몸이 아프다고 느낄 때만 해도 신경을 많이 써서 피로가 쌓였거니 생각했다. 그만두는 직원들을 잡아두려고 하고 싶은 말도 못하고 참았다가 집에 가서 화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항상 인상을 찌푸리고 들어오는 나에게 아내나 가족들은 말을 거는 것조차 무서워했다. 대화를 하다가도 늘 언성을 높이며 싸움으로 끝났고, 여행도 웃으면서 출발했다가 서로 등을 돌리고 오기 일쑤였다. 점점 가족들과도 멀어지고 아내의 말수가 줄어들었다. 급기야 이혼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심각한 부부싸움, 헤어지는 게 사는 길이라 싶어 이혼 결심

부부싸움으로 인해 아내의 우울증이 심해졌다. 두 차례나 아내를 입원시키고 돌아와선 정말 많이 울었다. 하지만 퇴원 후에도 부부 사이는 별로 나아진 게 없었다. 우리 부부의 불화는 직장에서, 또는 세상에 대해 느끼는 스트레스의 집결지였다.

나는 세상만사가 다 스트레스였다. 손님도, 직원들도, 가족도 모두 스트레스를 주는 존재들이었다. 항상 몸은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아팠고 어깨는 무거웠다. 처음엔 신경을 많이 써서 피로가 쌓였거니 생각했다. 삼 년 전, 급기야는 갑자기 몸에 열이 나고 배가 아파 응급실에 실려갔던 일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진단뿐이었다. 나중에는 일상생활이 불편할 정도로 한쪽 팔다리가 저리고, 마비 증상이 왔다. 정기검진 받는 게 일과가 되었지만 매번 같은 결과였다.

스트레스를 풀어보고 싶어 등산과 운동도 해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밖에서 쌓인 화풀이를 집에다 하기 시작했다. 이혼하지 않으면 다 죽겠다 싶어 아내에게 다그치듯 이혼하자고 했다. 서로 떨어져 있는 게 사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아내는 마지못해 수긍했다.

이혼 합의를 위해 재산분할을 하는데 서글픔이 밀려왔다. 가족들을 위해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다. 그런 내 자신이 비참해서 눈물도 많이 흘렸다.

이혼하기 전에 일주일만 마음수련 해보자

그날은 이혼 서류를 내려고 아내와 법원에 가는 길이었다. 앞장서서 걸어가는데 옆에 있어야 할 아내가 보이지 않았다. 피해버린 거였다. 얼마 후 누나한테 전화가 와서 그제야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음 날, 출근해 신문을 보는데 ‘이혼하기 전에 일주일만 마음수련해보고 결정하자’고 했다는 기사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와 흡사한 부부의 이야기가 마음에 와 닿았다. 우리도 그렇게 해보자 결정했다.

아내와 함께 지역센터에 등록을 했다. 처음 산 삶을 떠올려 버리는데 서른 살 때까지만 떠올랐다. 계속 수련을 하다 보니 서른한 살 결혼 이후의 기억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삶은 기억하기조차 싫을 정도로 힘들어서 깊숙이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부모님께서는 농사지으시면서 우리를 어렵게 키우셨다. 중학교 때부터 ‘무엇을 하면서 먹고살 것인가’를 고민했던 것 같다. 공고 졸업 후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3년간 일을 했다. 이후 대기업 제철소 건설 일을 하며 종잣돈이 모아져 1991년 카센터를 차렸고, 이듬해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밤늦도록 오로지 일에만 묻혀 살았다. 열심히 하니 돈도 제법 벌게 되었다. 그런데 또 다른 스트레스가 닥쳐왔다. 일년 이상 근무하는 직원이 드물 정도로 이직이 잦은 것이다. 처세에 관한 책들을 보면 직원들 입장에서 배려하라 나와 있었고, 그 뒤로는 직원이 하는 대로 그냥 따라주었다. 그러다 보니 10년 이상 오래 일하는 직원들은 늘었지만, 내 마음이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

돈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강했는지도 보였다. 어릴 때 어려운 집안환경, 아이들 뒷바라지, 죽을 때까지 부부가 먹고살 돈…. 미래에 대한 불안은 그 집착의 뿌리였다. 빚을 내서라도 카센터 부지를 계속 확장해갔다. 아내는 무리한 사업 확장에 불만이었고, 종종 잦은 부부싸움의 원인이 되었다.
결국 돈도 잘남을 뽐내려고 가지려 했던 것이었다. ‘나’란 존재는 돈, 자존심, 체면, 열등감 등으로 똘똘 뭉쳐 있었고, 그 집착이 스트레스와 병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마음 비울수록 모든 게 내 탓임 알게 돼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돈을 잘 벌어주면 남편의 역할을 다했다고 믿고 따뜻한 말 한마디 안 하고 일방적으로 대했던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전에는 95%가 아내 잘못이라 생각했는데, 점차 100% 내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내가 우울증에 걸린 것도 모두 내 탓이었다. 눈물이 쏟아졌다.

아이들한테는 무서운 아버지였다. 한번은 아들의 뺨을 때린 적이 있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기절하듯이 꼬꾸라지는 아들을 보면서 ‘애들한테도 내가 이런 존재였구나’ 허망했던 적이 있었다.
근데 수련을 하면서 돌아보니 내 부친의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아이들에게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어머니한테 무뚝뚝한 아버지를 싫어했는데 그 모습이 바로 나였다. 나도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을 물려준다고 생각하니 무섭고 두려웠다. 수련을 할수록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나하나 놓을수록 마음도 홀가분해졌다. 어깨도 가벼워지고, 활력도 찾아가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내, 아이들, 직원들…. 그들이 있어 내가 살 수 있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점점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이젠 아내, 아이들과도 부드럽게 이야기하고 집안일도 도와준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지, 내가 처음 설거지를 할 때 아내는 놀라서 멍하니 쳐다볼 정도였다. 요즘엔 아내 대신 아침 밥상도 차린다.

전에는 직원들도 나를 위해 필요한 존재였다. 지금은 함께하는 직원들이 있어서 이 자리에 있음을 알기에 자주 “고맙다”는 말을 한다. 직원들을 믿고 일을 맡기기 시작했고, 고객의 불만도 수용하면서 맞춰주니 힘든 것이 없다. 남자들은 가정에 대한 책임감에 자신의 욕구를 누르고, 억지로 주어진 일을 하며 사는 경우가 많다.

나 또한 50세까지만 열심히 돈 벌고 이후에는 내가 하고픈 것 하며 사는 게 꿈이었다. 우리 나이는 사업을 다시 시작하기에도, 직장생활을 하기에도 불안한 때다. 그러니 더욱 고통의 짐을 지고 살아간다. 그 짐을 내려놓으면 즐겁게 세상을 살 수 있다. 많은 중년 남성들이 자기의 삶을 한번 돌아봤으면 좋겠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 인생의 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Share on FacebookTweet about this on Twit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