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나갔던 프로댄서의 선택
이항우 / 자영업. 54세.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인순이, 김완선, 민해경, 김건모, 신승훈, 이승철, 현진영…
한때 TV를 통해 매일 볼 수 있었던 인기 가수들, 난 그들 뒤에서 춤을 췄었다.
나는 잘나가는 댄서였고 우리나라 최정상의 댄스 팀을 꾸리고 있었다. 댄스를 하고 싶은 사람들은 다 나를 찾아올 정도였고, 하루 두세 개씩 방송을 소화하느라 바쁜 날들을 보냈다.
나를 인정받게 해준 춤
춤을 처음 시작한 것은 대학교 축제에서였다.
댄스 참가 모집 포스터를 보고 친구와 찾아간 동아리.
사람 앞에 나서기를 힘들어하는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이 많던 내가 춤을 추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처음 출 때는 서툴렀지만 동작이 익숙해질수록 점점 춤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 당시에는 AFKN이라는 미군방송이 있었다.
거기서 방영하는 쇼 프로그램의 춤을 따라하고 뮤지컬영화 ‘Grease’를 극장 뒤에서 보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따라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그랬나, 주변 친구들이 잘 춘다 잘 춘다 하니 진짜 잘 추게 됐다.
학교 모임이나 축제 때만 되면 어김없이 나의 댄스에 환호와 박수를 보내줬다.
처음으로 뭔가를 잘한다 남에게 인정받자, 남을 즐겁게 해주는 춤의 매력에 더욱 빠졌다.
1980년대는 전 세계가 디스코 열풍에 휩싸여 있던 시절, 우리나라 클럽 여기저기서 디스코 경연대회 붐이 일어났다.
일급호텔과 클럽에서 상금과 상품을 걸고 대회를 개최했고 나가기만 하면 일등은 내 차지였다.
그때 시절 상금이 30만 원 정도면 평사원 봉급 정도이던 시절, 컬러TV, 오디오세트 등 가전제품도 상품으로 받아왔다.
그러던 중 인순이씨 매니저로부터 남자 댄서를 구하는데 해볼 의향이 없냐는 제의가 들어왔고, 그것이 우리나라 처음으로 본격적인 남자 프로댄서의 시작이 되었다.
1990년 제10회 ABU 국제가요제에서 한국가수 최초로 대상을 수상한 민해경씨와 함께
나를 돌아보게 해준 춤
김완선씨도 ‘인순이와 리듬터치’에서 연습생(?) 생활을 할 때 만나, 그녀의 데뷔곡 ‘오늘밤’ ‘리듬 속의 그 춤을’ 안무와 백업을 했다.
이후부터는 여러 가수들의 안무 요청이 쇄도했다. 민해경, 김건모, 신승훈, 이승철 등 KBS ‘젊음의 행진’ 전속 안무도 맡아서 하고 댄스 팀도 50명 정도로 인원이 늘어났다.
춤이 좋아서 하는 일이었지만, 당시 댄스 팀의 환경은 아주 열악했다.
방송 말고 밤업소 활동이나 이벤트 활동 후에는 돈을 못 받는 경우도 많았다. 댄스 팀원들 월급을 제때 주지 못해 항상 힘들었다.
댄스에 대한 열정으로 버텼지만 세대가 바뀌면서 경쟁하는 댄스 팀도 많아지고, 팀 유지가 힘들어서 10년 넘게 활동하던 댄스계를 떠나게 됐다.
이후 자영업을 하면서 돈도 꽤 모았지만 댄스계 후배들을 만나면 내가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아쉬움이 나를 힘들게 했다.
그 허함을 달래기 위해 술을 자주 마셨고 몸이 점점 축나기 시작했다.
몸 마음이 지쳐 있을 때 조카가 ‘삼촌, 피곤해 보여 좀 쉬다가 와’ 하며 마음수련을 권유했다.
쉬다 올 요량으로 옷가지 몇 개 챙겨서 찾아간 논산 메인센터.
앉아서 명상을 하라는데 내심 ‘어!! 잘못 왔구나’ 싶었다.
난 쉬러 왔는데 눈을 감고 자기를 돌아보란다.
하루가 지나고 ‘그래, 이왕 온 길에 시키는 대로 해보자’ 마음을 바꿔 먹고 시키는 대로, 영화 한편 같은 나의 지난날을 돌아보았다.
3일째, 4일째… 나를 돌아보는데… 정말 놀랬다.
1박2일 주말 명상캠프 시간에 시각장애인 참가자께 춤을 알려드리고 있다.
진짜 행복을 찾게 해준 춤
마음을 버리자 나 중심적인 입장에 빠져 있을 땐 잘 몰랐던 내 모습이 정확하게 보인 것이다.
나보다 잘난 사람을 보면 시기하고 질투하고, 나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 무시하고 멸시하고, 댄스의 트랜드는 바뀌고 있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나만 옳다고 고집했던 나.
내가 왜 망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만큼 이기적이고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내 실체를 알고 나니 너무 버리고 싶었다.
마음수련을 하며 한 겹 한 겹 양파 같은 가짜마음들을 빼기하니 나를 옭아매고 붙들고 있던 가짜마음에서 벗어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정한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
여행도 많이 다녀봤지만 그때뿐이었다면, 휴식 같은 진짜 휴식을 하게 되어 너무 감사했다.
마음빼기를 하니 몸도 마음도 가벼워져 수련 전에 먹던 스트레스성 알러지 약을 안 먹어도 될 정도로 좋아졌다.
주말이면 논산메인센터로 전국에서 수백 명이 넘는 분들이 명상을 하러 온다.
나는 그분들에게 자원봉사로 춤을 가르치면서 춤이 서로와 서로의 소통이라는 걸 알게 됐다.
예전에는 나 혼자 인정받고 잘나고 싶은 마음에서 춤을 췄지만 지금은 잘 춘다 못 춘다는 마음이 없이 함께 하나 되서 춤을 추면 즐거움이 극에 달한다.
마음수련을 하면서 천국과 지옥도 내가 만드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가짜마음인 내 마음속에 살면 지옥이고, 진짜마음인 세상을 사랑하면서 살면 천국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선택은 자신의 몫이다.